지난 8월 3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사건에서 기존 노사 합의와 달리 통상임금에 정기상여금을 포함시켜 법정수당을 재산정해 달라는 노동조합 측 청구를 인정했다. 즉, 회사가 주장한 신의칙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고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다.

회사 추산에 따르면 이 판결로 향후 근로자들에게 추가 지급해야 하는 총 비용은 1조원이 넘는다.

소송에서 사측은 최근 중국의 사드(THAAD) 보복 및 미국의 통상압력 등으로 영업이익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상임금 범위 확대로 천문학적인 추가법정수당을 부담할 경우 해당 기업뿐 아니라 우리 경제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신의칙 요건인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나 ‘기업 존립의 위태’는 모호한 개념이므로 엄격하게 해석․적용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근로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두고 회사 경영에 위협이 된다고 제한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회사는 법원 결정에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번 판결로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은 적자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금번 판결은 세계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국내 자동차업계에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해당 기업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국내 중소․영세기업은 5,000개가 넘는다.

또한 1조원에 달하는 우발채무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 전기차, 자율주행 등 신기술 도입을 위한 연구개발과 신성장 사업에 대한 투자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

여기서 우리는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을 등장시킨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원은 그간 노사 관행과 달리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추가법정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면 “근로자는 임금협상 당시 결정된 임금을 모두 지급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추가적인 법정수당을 지급받는 반면 회사는 예측하지 못한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된다.”고 봤다.

즉, 통상임금 기준이 변했다고 과거 합의가 무효라며 추가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하급심 판결은 대법원이 중시했던 노사 묵계의 관행이나 합의에 대한 신뢰보다는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의 해석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다 보니 경영상해고처럼 회사가 도산할 정도가 돼야 신의칙이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불여력이 있는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은 신의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아 회사 측이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공공기관의 경우 거의 모든 하급심 판결이 예산의 탄력성이라는 공공부문의 특징을 근거로 신의칙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처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나 공기업 노조만 그 과실을 얻게 되는 결과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판결마다 신의칙 적용기준이 바뀐다는 점도 문제다. 아시아나항공이나 현대중공업, 금호타이어는 1심에서 신의칙이 부정됐지만 2심에서는 인정됐다. 반면 동원금속, 보쉬전장은 1심에서 인정됐던 신의칙이 2심에서는 부정됐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판결에 대해 현장의 예측가능성을 저해하고 심지어 통상임금 소송을 ‘로또 판결’로 칭하는 비판적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또 다른 부작용은 신의칙에 대한 엄격한 해석이 노사관계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법원이 형식적인 법 적용에 치중해 기존 노사 합의에 반하는 청구를 인정한다면 노사는 서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판결이 노사관계의 근간인 노사 신뢰를 무너뜨린다면 노동법질서의 대원칙인 노사자치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될 우려가 크다.

이처럼 신의칙에 대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사건에 대한 신속한 심리(審理)가 필요하다. 2013년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따라 노사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한 구체적이고 명료한 기준 제시가 절실하다. 사법부의 결자해지의 지혜와 거시적 안목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