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제230회 경총포럼에서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요약·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병자호란은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와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했던 전쟁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북핵문제나 사드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병자호란 당시의 시대상이 결코 옛날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당시 조선이라는, 자기방어력이 없고 강대국 입김에 일방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처지의 국가가 어떤 길로 가는 것이 백성들에게 올바른 길이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오늘날에 있어 그 시사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만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중국은 최근 개최된 제19차 중국공산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시진핑 사상’이라는 것을 선언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마오쩌둥, 중국을 먹여 살리는데 성공한 등소평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의미할 정도로 확고한 위치에 오른것을 의미한다.

특히 시진핑은 향후 집권 구상을 얘기하면서 2050년, 즉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한지 101년이 되면 미국을 넘어서는 강대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이 사드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강대한 중화의 부활을 꿈꾸는 시진핑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걸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과거 역사상 가장 강력한 중국이 다가올 때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외교적 입장을 정할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한편 북핵을 선거의 주요 이슈로 삼았던 일본의 아베정권은 중의원 선거에서 완벽하게 승리하여 평화헌법 개헌의 추진 동력을 얻게 됐다.

1947년 일본의 패망 이후 공포된 평화헌법에는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도, 전쟁을 할 수도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후 일본 우파 정치지도자들의 염원은 바로 이 평화헌법의 개헌이 되어왔고, 그 염원이 이번 중의원 선거를 통해 실현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더욱이 미국은 일본을 중국의 견제 보조 공격수로 써야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이 재무장이 가능한 전쟁 가능국으로 변신한다 해도 중국견제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최근의 사건들은 1945년 이후 약 70년 동안 유지되어온 동아시아 질서가 2017년을 기점으로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 더불어 우리는 북핵 문제까지 떠안고 있다. 북핵이 단순히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4강과 연계되어 있다보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과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북핵을 독자적으로 감당할 능력이 있다면 이런 논란이 부질없겠지만 그러한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 문제는 병자호란 당시 47일간 포위된 상태에서 척화냐 주화냐의 선택지를 두고 갈등했던 만큼이나 엄혹한 현실이다.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은 이 엄혹한 선택지에서 어떤 결론을 냈는가.

최명길의 주화파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중국을 능가할 정도의 군사적 능력을 가진 것을 고려하면 조선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청나라와의 관계를 파괴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화친, 평화를 강조했다. 이에 김상헌의 척화파는 “청은 오랑캐이며, 우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싸워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맞섰다.

조정 대신들의 대다수가 척화파인 상황에서 인조는 결국 다수결의 결정에 따라 청과 맞서기로 한다.

척화파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바다를 방파제 삼아 장기 항전을 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인조와 조정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군의 기동력과 미약한 조선의 국방력까지 더해져 강화도로 미처 피신하지도 못한채 겨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은 전쟁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결국 전쟁 선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소수파의 대표자였지만 시종일관 이 전쟁을 반대했다. “명분과 의리가 소중하지만, 종사가 망하고 백성이 도마 위의 고기가 되는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 피해갈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택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종래까지 한국 역사 교육에서는 김상헌과 최명길을 일종의 역사적 라이벌로 놓고 양시론적 입장에서 교육을 해 왔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양시론이 성립할 수 없다. 하나가 옳다면 다른 하나는 그른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다.

고위관직자라면 공직에 있는 동안에는 개인보다는 공동체나 조직에 속한 백성의 안위를 위해 무엇이 옳은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마땅한데, 최명길이 바로 그런 기준을 가진 공직자였던 것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자, 중국의 명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고 진군해 올 것을 우려해 조선에 군대를 파병시켰다. 이 과정에서 치안의 공백이 생긴 만주지역에서는 여진족의 세력이 커지고 후금이라는 새로운 독립국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자 1598년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숨돌릴 틈도 없이 조선은 방어의 초점을 후금이 자리한 만주의 압록강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참전을 빌미삼아 조선에게 후금의 견제를 종용하기도 했다.

중국의 열강 사이에 낀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밖에 없었고 당시 왕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11년만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한다.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감각을 바탕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후금과 명 사이에서 대등한 등가 외교 전술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정에 실패한 광해군은 무리한 토목공사로 재정을 망치고 민심이 돌아서게 되자 결국 인조반정을 통해 내쫓기게 되었다.

인조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는 비합법적으로 왕을 몰아냈다는 명분적 하자를 만회하기 위해 후금과 명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폐기하고 철저한 친명 외교를 통해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후금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는데, 이 와중에 명나라가 후금을 경제적으로 압박하자 교역을 통하지 않고는 생필품을 구할 수 없었던 후금은 결국 원조를 거절한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9년 전 발발한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에는 다행히 왕실이 강화도로 피신하는 데 성공하고, 장기항전 태세에 들어가자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고 교역을 재개하는 등 합의에 성공했는데, 이때 최명길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명과 후금 양 국 모두와 잘 지내려 계속 노력했지만 현대에서도 그렇듯 상대적 약소국이 자신을 둘러싼 복수의 강대국 모두와 잘 지내려 해도 강대국 간에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나라에 도전해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후금은 명나라에 비해 강력해진 후금을 왕이 아닌 형제로 여기는 조선에게 불만을 품게 되고, 청으로 국가명을 바꾼 후에는 조선에게 명과 똑같은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지식인에게 왕은 둘 일수 없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을 도와 준 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이 때 최명길은 청과의 형제관계 유지에 최선을 다하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우유부단한 인조와 다수의 척화파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군신관계를 거절하자 청은 병자호란을 일으켜으며 선제적으로 강화도의 길목을 차단해버렸다.

인조는 최명길이 단신으로 적진으로 들어 가 시간을 벌어 준 틈에 겨우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지만 결국 삼전도에서 적국에 무릎을 꿇고 만다.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은 인조에게 “저들이 황제가 되었다 하면 알았다 하시고, 나중에 다시 ‘그때 알았다고 하지 않았냐’고 되물으면 ‘알았다는 것이 귀로 들었다는 것이지,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고 답하라” 한 바 있다. 최명길은 외교적 모호성을 유지해 청나라의 분노를 풀어야 한다고 조언했던 것이다.

또한 최명길은 “전쟁을 하려거든 강화도로 피신하지 말고 압록강변으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싸워야 한다”고도 했다. 적과 압록강변에서 전쟁을 벌여 평화조약을 맺으면 청군이 내륙 깊숙히 들어와서 민간인들이 포로가 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조의 무시로 결국 성사되지 못한 일들이지만, 양명학자였던 최명길은 청나라가 세계를 재패하는 것이 시대의 대세일 수 있다고 이미 받아들였던 것이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끌려간 수만 명의 여성들이 청군의 첩이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도 대다수의 조정 신하들은 정조의 훼손을 이유로 조선인 남편의 이혼을 허락하라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이때 유일하게 반대 목소리를 낸 게 최명길이었다.

“10만 이상의 민간인이 잡혀가서 노동력 하나가 아쉬운 판국에, 돌아온 여자들을 안 받아주면 어쩌라는 것인가. 돌아오는 길목에 연못을 하나 파서 그 연못에서 몸을 씻으면 정조를 회복한 것으로 해주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어찌보면 코미디 같지만 이런 특단의 조처가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최명길은 이처럼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대안을 제시했던 인재였다.

최명길은 화친의 길을 선택한 순간 “후대는 소인배이자 간신이라 매도하겠지만 현실을 위해 오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있는 오늘날, 병자호란이 불편한 데자뷰 현상으로 나가오는게 사실이다.

적어도 한 나라의 주요 공직에 있는 사람이면 현실에 발을 딛고 책임감과 결단을 강조하고 대안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중의 외압에 휘말려 있고 북핵 위기에 직면한 현실 속에서 최명길의 조선시대판 전략 마인드는 우리가 진지하게 재조명해야 할 소중한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