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11월 10일 반환점을 돌은 문재인 정부 2년 반의 경제성적표는 초라하다. 올해 경제성장율 전망치는 높게 잡아야 2.0%이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비상상황이 아니었음에도 1%대(帶)의 저성장을 했다는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 문재인 정부는 저성장 요인으로 미·중 무역갈등 등 ‘대외 여건 악화’를 들고 있지만 대외 여건 악화가 저성장의 방패가 될 수는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남유럽 재정 위기’를 겪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우리 경제성장률은 세계성장률 평균을 3년 내리 밑돌았다. 그리고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잠재성장률’ 이하의 성장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각종 제도적 요인으로 우리 경제가 실력만큼 성장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정책실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분배가 악화됐고 고용의 질이 개악됐으며 국가 재정건전성도 훼손됐다. 문재인 정부 출범을 기준일로 2019년 말 추정치를 대비 시키면, 소득5분위 배율은 4.73배에서 5.3배로 악화됐고, 비정규직 비율은 32.9%에서 36.4%로 높아졌으며 국가부채비율은 36.0%에서 37.1%로 증가했다. 저성장까지 감안하면 문재인 정부는 ’4마리의 토끼‘를 놓친 것이다.

이 정도 경제 성적이면 문재인 정부는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진 것이다. 영어 표현에 ‘왼쪽으로 이동해서 보라’(shift left)는 관용구가 있다. 우리는 글씨를 쓸 때 왼쪽부터 시작해 오른쪽으로 쓴다. 따라서 ‘왼쪽으로 이동해 보라’는 것은 ‘원점으로 회귀’해 다시 성찰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현상의 본질을 천착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처참한 경제실패는 경제정책 기저에 깔린 철학과 가치체계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경제철학은 “경제적 기회는 사전적으로 ‘평등’해야 하며 과정은 ‘공정’해야 하고 결과는 ‘정의’로와야 한다”로 압축된다. 대단히 유려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우선 현실적으로 경제적 기회가 ‘사전에 평등하게’ 주어질 수 없다.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 아닌 탐색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은 ‘법 앞의 평등 즉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로 좁게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개인은 각기 달리 태어났기 때문에 ‘동일한 선에서의 출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유주의 경제철학자 미제스(Mises)는 “자연의 공장문을 나서는 순간 같은 것을 두 번 다시 만들지 않겠다는 도장이 찍힌다”고 은유했다. 따라서 ‘경제기회의 사전적 평등’은 현실 세계에서 작동할 수 없다.

기회가 사전적으로 평등하게 주어진다고 가정하고 여기에 ‘과정이 공정하다’는 조건이 추가되면 결과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논리적으로,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과정이 공정하다면 결과는 ‘이미 정의롭기’ 때문이다. ‘결과가 정의로와야 한다’는 주장이 ‘결과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시스템적으로 ‘과다식별’(over-identification)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소득순환과정에서 ‘평등, 공정, 정의’는 공존할 수 없다.

‘결과적 평등을 정의로 인식’하면 국가개입주의는 당연선(當然善)이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정부’, ‘국가가 최고의 고용주’여야 한다는 정책 사고는 국가개입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사고는 ‘국가의 책임’을 무한대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견지하는 ‘국가개입주의’는 ‘국가는 선하고 전지(全知)하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를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국가가 박애주의의 실천자가 된다면 모두들 입법을 통해 특혜를 받으려 할 것이다. 국가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추가하지 않고서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한 손으로 무엇인가를 누군가에서 빼앗아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줘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국민을 ‘국가에 의존하는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다. 약자로 구성된 사회가 역동적일 수 없다. 이익집단의 ‘보호와 육성’ 요구만이 넘치게 된다.

‘생계형’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를 보자. 170년 전에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1850)가 쓴 ‘양초업자의 탄원서’에 답이 있다. 태양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양초업자를 토탄에 빠뜨리기 때문에 ‘낮에도 모든 창을 커튼으로 가리게 하는 법’을 만들어달라는 청원이다. 그렇게 되면 양초를 생산하기 위해 낙농업이 번성할 것이므로 프랑스 전체가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놀라운 촌철살인이다.

이름이 어찌 되었건 ‘적합업종제도’는 치명적 인식오류를 범하고 있다. 경쟁의 기본단위는 종(種)이 아닌 개체(個體)라는 기본을 망각한 것이다. 경쟁의 기본단위가 종이라면 사자는 동료 사자를 위해 얼룩말을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얼룩말을 잡아먹으면 동료의 먹이감이 줄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로 대기업을 축출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빈자리는 중소기업을 위해 남겨질 것인 가. 중견기업이 들어올 것이다. 적합업종 제도는 ‘내 경쟁자를 내 시야에서 쫒아 달라’는 이기적 주장에 다름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정책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사고체계에 ‘시장과 자유 그리고 개인’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정부의 설계와 규제 그리고 이익집단’이 채운 나머지 자율과 경쟁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정부의 역할이 커질수록 민간은 구축된다. 일자리 창출을 놓고 정부와 민간이 경쟁하다 보니, 세금을 내는 ‘40대 제조업 일자리 한자리’와 세금이 들어가는 ‘60대 사회적 일자리’가 등가물(等價物)로 통계에 잡히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일자리를 만드는 경쟁에서 ‘정부가 이길수록’ 재정은 탕진되고 일자리 질은 나빠진다.

원점으로 회귀해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궤도 수정 없이 나머지 임기 반을 채우면 경제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부가가치를 팔아 현금화 한 뒤, 생산에 기여한 사람에게 그 몫을 나눠줄 때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부는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주체가 아니다.
기업에게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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