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제225회 경총포럼에서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요약·편집한 것이다<편집자 주>.

서세동점기의 시대적 과제

한 세기 전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점차 진출해 오던 시기인 서세동점기의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과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서양은 프랑스혁명 등을 겪으면서 국민국가가 등장했고 국민국가가 밖으로 뻗어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 열강이었다.

때문에 국민국가를 수립하지 못하면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변화는 변방에서

19세기 영국의 중국 진출이 본격화될 당시를 살펴보면 이른바 ‘변화는 변방에서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기존의 권위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변혁기는 주변국과 주변인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 세계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테네나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야만인 취급을 당하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한 세기 전 동북아에서 서구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거듭 난 것도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멸시하던 일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중 삼국을 통일한 최후의 승자는 변방 취급을 받던 신라였고, 한 세기 전 기독교와 신학문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천대받던 평안도와 함경도인이었다.

제1차 아편전쟁(1839-1842)

중국은 영국의 중국 진출을 이른바 ‘조공을 바치러 온 것’으로 해석하고 중국 영토 중 가장 변방인 광둥항을 개항했다.

비단과 도자기, 차 등 중국의 품질좋은 상품들이 영국으로 전해지면서 대금으로 치른 은이 중국으로 흘러가자,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유통시켜 은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이에 중국이 항의하여 영국 선박을 습격한 것을 계기로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중국은 아편전쟁에서의 패전을 우연으로 치부했다. “승패는 병가지 상사”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패전 이후에도 서양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 후 중국은 영국에게 5개의 항구를 추가로 개방하면서 ‘이이제이’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프랑스에게 무역권을 개방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보급기지이자 피항장으로서 일본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흑선이 일본을 개항시킴으로써 이른바 태평양 시대의 개막이 올랐다.(1854년)

1856년 2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1860년 영국과 중국 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조공체제가 붕괴되고 중국은 서양에 완전히 개방되었다. 북경조약은 당시 우리나라에게도 큰 의미를 가진다.

연해주 할양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이 깨짐으로써 각축전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은 북경조약 이후 비로소 각성을 하게 되고 중체서용의 양무운동을 시작하여 서양 기술을 받아들인다.

일본 메이지 유신(1868년)으로 국민국가 수립

일본은 1868년 일본의 변방인들이었던 사쓰마 번의 무사들이 주축이 되어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형 국민국가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서구 근대를 굴뚝과 인권으로 표현한다면 일본의 근대는 굴뚝과 민권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서양은 만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개념을 도입했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사무라이의 권리를 ‘국권’으로 그 외는 ‘민권’으로 분리했다.
실패의 역사 누구의 책임일까?

동서양이 근대화를 이루는 사이 우리나라는 흥선대원군이 쇄국양이 정책(1863-1873)을 펼치고 있었다. 시대적 과제로 개혁과 개방을 내세웠지만 이는 서양 개방을 막기 위한 미봉책으로서의 개혁이었다.

중국이 양무운동을 전개하고 일본이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에 매진하고 있던 것과 비교할 때, 대원군의 쇄국양이 정책은 명백한 시대적 착오였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위정자의 잘못된 국제정세 파악과 대외정책이 어떠한 결과를 자아내는지를 명증하는 역사의 경과로 되새겨야 한다. 1876년 한 일 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 침략의 길을 트게 된다.

이에 조선은 일본에 1차 수신사로 김기수를 파견하였는데, 오늘의 시각에서 볼 때 일본이 이미 서구 열강을 흉내내는 아류 제국주의로 표변한 상황에서 도덕률에 기초한 교린의 의례외교는 무용지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패권 다툼이 심화되고 일본의 제국주의 열강 등극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가 주는 교훈

1. 자강이 결여된 세력균형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조선책략’이 오늘에 주는 교훈은 “토지와 인민을 탐한 적이 없다”던 중국이나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라던 일본이 더 큰 침략자였으며, “늘 약소국을 돕는다”던 미국도 우리가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는 역설이다.

힘의 정치가 작동하는 국제정치판의 동력은 국익이며, 영원한 적과 우방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2. 포용과 관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보면 역사에 도돌이표가 있는 느낌이 든다. ‘보수와 진보 ’, ‘친미와 반미’ 오늘 우리 안의 이분법은 한 세기 전 망국을 초래한 ‘개화와 수구’ ‘친일과 반일’의 분열과 진배없다.

권리만 주장하는 구화와 깃발이 가득한 요즘 포용과 관용이라는 ‘또 하나의 리더십’은 여전히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의 시계는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치욕의 역사가 오늘에 주는 경고를 되새길 때가 바로 지금이다.